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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각 국의 디지털 탈탄소 전략

해운업으로 향하는 Global 탈탄소 규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 감축 요구가 정치·경제·산업 전반에 걸쳐 본격화되면서, 해양 산업 역시 더 이상 규제의 사각지대가 아닌, 오히려 가장 먼저 강도 높은 규제를 마주하는 분야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탄소 규제는 단순한 환경 의제가 아니라, 선사의 비용 구조와 경쟁력을 결정하는 구조적 변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칼럼에서는 EU와 IMO가 주도하는 탈탄소 규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미국·싱가포르·노르웨이 등 주요 해양 국가들이 어떤 ‘디지털 기반 탈탄소 전략’을 펼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현재 글로벌 흐름을 조망해보고자 합니다.
탄소 규제는 왜 지금, 그리고 왜 해운 산업을 향하고 있는가
해운은 전 세계 상품 물동량의 약 80~90%를 담당하는 핵심 산업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 탄소배출량의 약 3%를 차지합니다. 더욱이 선박은 한 번 건조되면 20년 이상 운항되기 때문에,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2030년과 2050년의 글로벌 탄소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또한 대기업들의 공급망(Scope 3) 배출 관리가 강화되며, 선박의 탄소배출은 이제 단순한 “규제 영역”을 넘어 글로벌 기업들의 ESG 경쟁력과 직결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EU와 IMO는 해운 산업을 향해 가장 강력한 탈탄소 규제 패키지를 도입했고, 그 영향력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EU와 IMO - 해운 산업을 뒤흔드는 규제의 두 축
EU의 ETS 편입 – 탄소비용이 ‘연료비’처럼 고정비가 되는 시대
EU는 2024년부터 해운업을 본격적으로 ETS(탄소배출권 거래제)에 편입했습니다. 이 말은 곧, 선사가 EU 수역을 운항할 때 발생시키는 배출량만큼 유럽 시장에서 탄소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탄소 가격은 이미 연료비에 준하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향후 의무 할당 비율(2024년 40% → 2026년 100%)이 확대되면 그 비용은 더 커질 전망입니다.
여기에 2025년부터는 FuelEU Maritime이 시행되어 선박이 사용하는 연료의 GHG 배출 강도 자체가 규제 대상이 됩니다. 연료만 교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운항 방식·에너지 관리·항로 최적화 등을 총체적으로 개선해야만 대응할 수 있는 규제로 바뀐 것입니다.
IMO의 GHG 전략 - 2030년과 2050년의 분명한 감축 목표 제시
IMO는 2023년 GHG 전략을 통해 국제해운의 중장기 목표를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 2030년까지 2008년 대비 최소 20%, 가능하면 30% 감축
- 2050년 전후 국제해운에서 실질적 Net-Zero 달성
또한 EEXI(선박 설계 효율), CII(운항당 탄소배출 지표)를 통해 선박 개별 단위의 에너지 효율과 운항 효율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고, 기준에 미달할 경우 출력 제한, 개선 계획 제출, 운항 제한 등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즉, IMO 규제는 더 이상 선언적 목표가 아니라 선박 한 척 한 척에 대해 매년 점수를 매기고 성적표를 요구하는 체계로 진화한 것입니다.
규제가 강해지자, 각국은 디지털 기반 전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규제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지만 선사와 항만이 단순히 “연료를 바꾸는 것”만으로 대응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탄소 규제는 정확한 데이터 기반 MRV(측정–보고–검증), 운항 최적화, 전동화 장비의 효율적 운영, 탄소 배출량의 실시간 추적 등 디지털 기술 없이는 만족시킬 수 없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 주요 해운 강국들은 하나같이 디지털·AI·데이터 기반의 ‘탈탄소 인프라’를 정책 차원에서 강화하고 있습니다.
사례 1: [미국] “환경 정의(EJ)”가 만들어낸 디지털 기반 항만 탈탄소 전략
미국의 탈탄소 정책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사회적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LA·롱비치, 뉴저지·뉴욕, 휴스턴 등 미국의 주요 항만은 단순히 물류 시설을 넘어 수백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사회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수십 년 동안 디젤 트럭·야드 장비·선박 배출로 인한 대기오염에 시달려 왔습니다. 미국 정부가 항만 배출을 단순히 환경문제가 아닌 “환경 정의(Environmental Justice)”의 문제로 정의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후 규제가 곧 건강 규제가 되고, 건강 규제가 다시 정치적 의제와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에서 미국의 감축 정책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2020~2021년 팬데믹 동안 미국 서안 항만이 심각한 적체를 겪으며, 공급망 전반의 취약성이 드러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항만 외곽에 100척이 넘는 컨테이너선이 정박하며 미국 전역의 물가 상승과 재고 부족을 초래했습니다. 정부는 그때 “청정항만”과 “안정된 공급망”이 결국 같은 문제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탈탄소 정책을 물류 경쟁력 강화 전략으로 동시에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등장한 것이 Clean Ports Program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겉으로는 친환경 항만 전환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 항만의 운영 방식 자체를 전동화 장비와 디지털 데이터 기반의 운영 체계로 완전히 대체하는 대전환 프로젝트에 가깝습니다. 미국은 전기 RTG, 전기 야드트랙터, 수소 기반 하역장비 같은 Zero-Emission 장비 도입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 한편, 이 장비들이 실제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IoT·센서 기반 배출 측정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항만의 충전 인프라 역시 단순 설치가 아니라, 데이터 기반 수요예측 모델을 활용해 어느 시점에 어떤 장비가 충전을 필요로 하는지 예측하고, 전력부하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기 위한 시스템을 병행 구축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은 ‘감축 설비를 깔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데이터로 항만 전체를 하나의 에너지 생태계처럼 관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흐름은 DOT가 발표한 Maritime Energy & Emissions Action Plan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 계획은 선박·항만·내륙운송 전체를 아우르는 에너지 사용과 탄소배출을 ‘국가 단위의 데이터 프레임워크’로 통합하려는 시도입니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림은, Zero-Emission 항만이자 동시에 공급망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스마트 물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즉, 미국은 탈탄소를 비용이 아닌 기술적·산업적 기회로 재정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례 2] 싱가포르 - “정시성(Just-In-Time)” 집착이 만든 디지털 감축 모델
싱가포르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운영 효율’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국가입니다. 국토가 좁아 배후지 물류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항만 혼잡이 발생하면 즉시 경쟁 허브(말레이시아·중국·한국·아랍 등)에 물동량이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싱가포르가 세계 최대 환적 항만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바로 이 공간적 한계를 운영 프로세스와 디지털 기술로 극복해온 능력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싱가포르의 탄소 감축 전략에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싱가포르는 배출을 줄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연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기 시간을 줄이고, 불필요한 느린 운항을 없애고, 항만 서비스를 정확하게 조율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철학의 절정이 바로 digitalPORT@SG™입니다.
digitalPORT는 단순한 포털이 아니라, 항만에 드나드는 선박의 모든 ‘Port Call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운영 지능화 플랫폼입니다. 선사는 ETA를 입력하고, 항만 당국과 터미널은 부두 배정·파일럿·예선·급유·담수·하역 준비 등 수십 개의 이벤트를 플랫폼에서 자동으로 매칭합니다. 여기에 AI 기반 ETA 예측과 기상·해상교통 예측 모델이 결합되면서, 선박은 목적지 항만에서 언제 접안이 가능한지 정확히 알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이는 곧 연료 절감과 탄소 감축으로 이어집니다.
싱가포르는 그동안 ‘생산성’의 관점에서만 JIT(Just-In-Time) Port Call을 강조해 왔지만, 최근에는 그것이 탄소 감축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싱가포르 MPA는 JIT 기반 운영만으로도 선박 연료 사용량을 5~10% 절감할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바이오연료나 메탄올과 같은 대체연료 도입보다 훨씬 손쉽고 즉각적인 감축 효과입니다.
또한 싱가포르는 자국 항만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로테르담·상해 등과 함께 Green & Digital Shipping Corridor를 구축해 항로 단위의 탄소 데이터를 주고받고, MRV 보고 기준과 JIT 운영 원칙을 상호 정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싱가포르가 단순히 ‘국가 단위 정책’이 아니라, 글로벌 감축 표준을 선도하려는 전략적 야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싱가포르의 장기적 목표는 명확합니다. 자국 항만을 세계 최초의 운영 최적화 기반 저탄소 항만으로 만들고, 이것을 아시아 해운 시장의 표준으로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식량도, 에너지도, 공간도 부족한 나라가, 결국 디지털을 통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싱가포르의 스토리는 해양 산업 디지털 정책의 모범 사례로 손꼽힙니다.
[사례 3] 노르웨이 - 극지·피오르드 환경이 만든 ‘과학적 감축 모델’과 디지털 트윈 중심 전략
노르웨이는 자연환경부터 매우 독특한 국가입니다. 굽이치는 피오르드와 겨울철 혹독한 날씨, 그리고 북해의 거친 바람과 물결은 선박 운항을 어렵게 만들며, 연료 효율과 안전성은 생존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이 노르웨이를 해양 기술 강국으로 만든 핵심 배경이며, 탈탄소 전략에서도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접근을 취하게 했습니다.
노르웨이는 “항로별로 환경과 기상이 다르기 때문에, 감축 전략도 항로 단위로 설계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항로별 감축 실증 플랫폼을 구축한 나라가 되었고, 이것이 바로 Green Shipping Programme(GSP)입니다. GSP는 정부와 산업계가 공동으로 특정 항로에 전기·수소·메탄올·암모니아 선박을 투입하고, 그 항로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흐름과 배출 데이터를 정밀하게 수집·분석합니다. 단순히 새로운 선박을 띄우는 것이 아니라, 항로에서의 기상 변화, 하역 패턴, 에너지 공급 가능성, 선박운항 패턴까지 모두 데이터로 재현하는 구조입니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트윈 기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노르웨이는 선박 한 척, 항로 하나, 항만 하나를 디지털 공간에 그대로 재현하여 연료 사용량·배출량·운항 패턴·기상 조건을 시뮬레이션합니다.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새로운 연료의 사용 가능성을 검증하는 데에도 유용하고, 자율운항 기술과 결합될 경우 더욱 강력한 운항 효율 개선 효과를 냅니다.
노르웨이의 정책은 그 자체로 실험실 같습니다. 이들은 실제 항로를 실험 공간으로 보고, 선박–항만–연료 공급망–디지털 트윈 모델을 하나의 시스템처럼 연결합니다. 그 목표는 단순히 탄소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디지털 기반 해상운송 생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2030년 이후 노르웨이가 계획하는 “국가 단위 Zero-Emission Corridor”는 그 야심의 상징입니다.
노르웨이가 이런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해상풍력·수력발전 등 풍부한 친환경 에너지원, 강력한 연구기관과 조선 기술, 환경 규제와 디지털 기술을 십 수년간 병행해온 정책 DNA가 모두 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는 지금도 자율운항·디지털 트윈·대체연료 기술을 하나의 생태계처럼 결합하며 전 세계 해운·조선 디지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